1599년, 로마의 한 성당 지하에서 석관이 열렸다. 봉인된 지 거의 800년. 안에는 뼈와 먼지만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석관 속에는 한 젊은 여자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얼굴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잠든 사람 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체칠리아. 죽은 지 1300년이 넘은 사람이었다.
체칠리아는 서기 230년경 로마의 귀족 여성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만으로 죽을 수 있던 시대였다. 황제의 관리들이 도시 곳곳에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체칠리아는 몰래 개종한 것도 모자라, 이교도였던 남편 발레리아노까지 그리스도교로 끌어들였다. 당국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그냥 처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본보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체칠리아를 자기 집 증기 목욕탕에 가뒀다. 온도를 치사량까지 끌어올렸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쪄 죽이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꼬박 하루하고도 밤까지 버텼다. 그래서 처형인이 보내졌다. 로마법은 목을 베는 칼질을 세 번까지만 허용했다. 세 번, 그 이상은 안 된다. 처형인은 세 번 칼을 내리쳤다. 우리 속담에 “세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는 세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체칠리아는 목에 세 개의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지만, 그 상태로 사흘을 더 살았다.
소문이 로마 전체에 퍼졌다. 처형에 실패한 여자가 죽어가면서도 설교를 멈추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람들이 도시 곳곳에서 몰려왔고,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사람들은 천과 항아리에 그녀의 피를 담아 성물로 가져갔다. 그녀가 숨을 거두자, 당시 로마 지하 교회를 이끌던 교황 우르바노 1세가 그녀를 산칼리스토 카타콤에 안장했다. 역대 교황들의 무덤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그녀의 유해는 지하에서 6세기를 보냈다. 821년, 교황 파스칼 1세가 유해를 티베르강 건너 트라스테베레 지역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딴 성당으로 옮겼다. 석관은 제단 아래 봉인되었고, 이후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그로부터 거의 800년 뒤인 1599년, 스폰드라토 추기경이 성당 보수를 지시하면서 석관을 열기로 했다.
1300년이 지난 시신은 사람들이 예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체칠리아는 오른쪽으로 누워 있었고, 무릎은 모아져 있었고, 두 팔은 앞으로 뻗어 있었고, 얼굴은 땅을 향하고 있었다. 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목에는 세 줄의 깊은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1300년 전 처형인이 남긴 세 번의 칼자국——그대로였다. 추기경은 조각가 스테파노 마데르노를 불러, 석관이 다시 닫히기 전에 이 모습을 기록하라고 했다.
마데르노는 실물 크기의 대리석 조각상을 완성했다. 발견된 그대로의 모습——고요한 자세, 돌린 얼굴, 목의 세 줄 상처. 1600년에 완성된 이 조각상은 지금도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제단 아래에 있다. 로마에서 가장 가슴을 울리는 예술 작품으로 꼽힌다. 극적이어서가 아니다. 너무나 고요해서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지도 않다. 고통스러운 표정도 없다. 그냥 누워 있다. 발견되었을 때 그대로. 4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 조각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하나 더 있다. 썩지 않은 유해가 발견되기 훨씬 전부터, 체칠리아는 이미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명이었다——음악의 수호성인으로. 전설에 따르면 발레리아노와의 강제 결혼식에서, 로마의 악기들이 주위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녀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장면은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오늘날 전 세계의 콘서트홀과 음악원이 그녀의 이름을 달고 있다. 로마가 침묵시키려 한 여자는, 온 세상이 노래로 기리는 성인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