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봄. 영국 고고학자 로빈 벌리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바로 남쪽, 로마 군사 요새 빈돌란다에서 시커먼 진흙을 파고 있었다. 엽서보다 얇은 나무 조각이 하나 나왔다. 목수가 버린 쪼가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빛에 비추자 글씨가 보였다. 자작나무 위에 먹으로 쓴 라틴어, 거의 1,900년 전의 것이었다. 그 순간, 죽은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비밀은 진흙에 있었다. 이 요새는 서기 85년경부터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번 허물고 다시 지어졌는데, 매번 이전 층이 축축한 흙 아래 묻혔다. 산소가 차단되니 나무와 잉크가 썩지 않고 버텼다. 벌리의 아들 앤드루가 발굴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1,600장이 넘는 서판을 꺼냈다. 황제의 칙령도, 위대한 선언문도 아니다. 군인들과 그 가족이 주고받은 일상의 쪽지. 바로 그게 이 서판을 특별하게 만든다.
가장 유명한 건 생일 초대장이다. 인근 요새 장교의 아내 클라우디아 세베라가 빈돌란다의 친구 술피키아 레피디나에게 쓴 편지다. "꼭 와줘요, 당신이 와야 제 생일이 즐거워요." 대부분은 서기관이 대신 썼다. 하지만 편지 맨 아래, 삐뚤빼뚤한 친필로 직접 덧붙인 한마디. "기다릴게요, 언니." 이 짧은 문장이 로마 세계 전체에서 여성이 직접 쓴 가장 오래된 라틴어 기록이다.
또 하나, 어떤 군인의 편지가 있다. 로마군에 끌려온 외지인 병사가 고향 집에 보낸 것이다. "양말 두 켤레, 샌들 두 켤레, 속옷 두 벌 보냈습니다." 이게 영국 역사상 속옷이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다. 청동 갑옷도, 전장의 함성도 아닌 — 비 맞고 얼어붙는 변방에서 깨끗한 양말이랑 속옷 좀 보내달라고 가족한테 편지 쓴 한 사람 이야기다. 신화가 아니다. 그냥 어느 날의 일상이다.
다른 서판도 가관이다. "병사들 맥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좀 보내주십시오"라는 간청이 있고, 752명 중 실제 전투 가능 인원이 296명뿐이라는 부대 현황 보고서도 있다. 현지 원주민을 "브리툰쿨리"라고 적은 정보 보고서도 나왔는데, 풀어 쓰면 "쪼잔한 브리튼놈들" 정도다. 갑옷도 제대로 안 걸친다며 비웃는 내용. 요즘 단톡방 뒷담화랑 다를 게 없다.
진짜 가슴에 남는 건 이거다. 이 사람들은 로마 출신이 아니었다. 지금의 네덜란드에서 온 바타비아인, 벨기에에서 온 퉁그리아인, 프랑스에서 온 갈리아인. 정복당한 땅에서 차출돼 "알려진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축축하고 칙칙한 섬으로 보내진 사람들이다. 편지마다 작고 절박한 연결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들에게 양말을 부치는 어머니, 생일잔치를 준비하는 친구들, 험담을 나누는 장교들.
사람들은 이 서판을 "로마 시대 이메일"이라 부른다. 딱 맞는 말이다. 짧고, 어수선하고, 줄임말 투성이에, 지극히 개인적이다. 빈돌란다 발굴은 지금도 계속된다. 매 시즌 새 서판이 진흙에서 올라온다. 옛말에 사람은 가도 말은 남는다고 했다. 그런데 2천 년을 버틴 그 말이란 게 — 양말 좀 보내줘, 맥주가 떨어졌어, 내 생일에 와줘. 우리와 그들 사이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