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스스로를 파라오라 선언했다. 섭정도 아니고, 왕비도 아니고, '위대한 왕의 아내'도 아닌——파라오. 상하 이집트의 완전하고 신성한 절대 군주, 모든 칭호와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갖춘 왕. 그 이름은 하트셉수트. 그녀가 카르나크에 세운 오벨리스크는 오늘날까지 우뚝 서 있다——그 비범한 치세에 대한 굽히지 않는 증언으로서.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1세의 딸이자 투트모세 2세의 아내였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왕위는 후궁 소생의 어린 아들——훗날의 투트모세 3세——에게 돌아갔다. 어린 왕의 계모이자 고모였던 하트셉수트는 너무 어려서 다스릴 수 없는 아이를 대신하여 섭정으로서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러나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전례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파라오의 칭호 자체를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이다. 공식 예술과 비문에서 그녀는 남성 왕으로 묘사되었다——왕의 킬트를 입고, 신성을 상징하는 가짜 수염을 달고, 상하 이집트의 이중관을 쓴 채로.
카르나크에서 하트셉수트는 가장 극적인 건축적 흔적을 남겼다. 아스완 화강암 하나의 돌덩이에서 깎아낸 두 개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바로 그것이다. 더 높은 것은 29.5미터에 달하며 무게는 약 323톤이다. 오벨리스크는 아스완에서 채석되어 특별히 건조된 바지선에 실려 나일강을 따라 200킬로미터를 내려왔고, 카르나크에 세워졌다. 그 꼭대기——피라미디온——는 호박금으로 덮여 있었다. 금과 은의 천연 합금인 그것은 이집트의 태양 아래 얼어붙은 번개처럼 타올랐다.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그 높이는 하늘을 찌르고, 그 빛은 해처럼 두 나라를 비추노라. 대지가 세워진 이래 이 같은 것은 일찍이 없었노라.”
하트셉수트는 약 22년간 통치했으며, 이집트는 번영을 누렸다. 그녀는 푼트 땅으로의 유명한 교역 원정을 시행했고, 신전 건설을 확대했으며, 상대적인 평화를 유지했다. 기원전 약 1458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거나——혹은 권좌에서 밀려났을 때——의붓아들 투트모세 3세는 비로소 어린 시절부터 명목상 보유하고 있던 왕좌를 단독으로 장악했다.
그 뒤에 벌어진 것은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기억 말살 작업 중 하나였다. 투트모세 3세는——훗날 이집트 최고의 군사 파라오,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불리게 될 인물은——이집트 전역의 기념물에서 하트셉수트의 이름과 형상을 제거하라 명했다. 그녀의 카르투슈는 신전 벽에서 정으로 쪼아졌다. 조각상은 부서져 땅에 묻혔다. 그녀의 초상은 투트모세 1세, 2세, 또는 3세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 작업은 철저하고 계획적이었으며,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하트셉수트는 사실상 이집트 역사에서 3천 년 넘게 사라졌고, 19세기 고고학자들이 그녀의 통치 증거를 맞추기 시작할 때까지 잊혀져 있었다.
그러나 카르나크에서 투트모세 3세는 풀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다.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는 너무 거대하고 너무 신성하여 파괴할 수 없었던 것이다——어찌 되었든 그것은 아문 신 자체에 바친 기념물이었고, 하트셉수트는 단지 그 건립을 명했을 뿐이니까. 그리하여 투트모세는 다른 전략을 택했다. 오벨리스크의 하부를 벽으로 둘러싸고, 하트셉수트의 비문과 형상을 돌로 가려버린 것이다. 오벨리스크 자체는 손대지 않은 채.
그 아이러니는 소름이 끼칠 만큼 정교하다. 투트모세가 쌓은 벽은 실은 하트셉수트의 비문을 풍화와 훼손으로부터 보호했던 것이다. 벽이 마침내 무너졌을 때, 감춰져 있던 비문은 바깥에 노출되어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온전한 상태였다. 계모를 역사에서 지우려 했던 조카는 뜻하지 않게 그녀의 말이 살아남도록 보장한 셈이 되었다. 오늘날, 카르나크의 하트셉수트 오벨리스크는 이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고대 오벨리스크로 남아 있고, 비문은 여전히 읽을 수 있으며,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돌 위에 선언되고 있다——3천 5백 년 동안 이어진 가문의 다툼에서, 마지막 말을 한 것은 그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