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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과 정복·2/4·3
Photograph of Vatican & St. Peter's Basilica

The place

Vatican & St. Peter's Basilica

미켈란젤로, 시스티나의 고통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거의 파괴한 조각가

1508-1512Vatican & St. Peter's Basilica

1508년,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였다. 피렌체의 다비드상은 이미 전설이었다. 하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원한 건 조각이 아니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라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조각가지 화가가 아니라고. 건축가 브라만테가 꾸민 함정이라고 의심했다. 자신을 실패시켜서 로마의 새로운 총아, 젊은 라파엘로에게 길을 열어주려는 계략이라고.

하지만 율리우스 2세는 보통 교황이 아니었다. 직접 군대를 이끄는 전사였고, 별명은 '일 테리빌레' — 러시아의 이반 뇌제에게 붙은 것과 같은 단어였다. 율리우스가 명령하면 '아니오'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의뢰를 받아들였다.

이후 4년은 미술사에 유례가 없는 고행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비계를 직접 설계했다. 천장의 곡선을 따라 휘어진 나무 플랫폼이 바닥에서 20미터 높이에 매달려 있었다. 조수 대부분을 해고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거의 혼자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팔을 위로 뻗은 채, 마르기 전에 끝내야 하는 젖은 회반죽 위에 그림을 그렸다.

육체가 치른 대가는 참혹했다. 친구 조반니에게 보낸 시에서 이렇게 썼다. "수염은 하늘을 향하고, 뒷머리는 등에 파묻히고… 붓이 얼굴에 떨어져 내 얼굴을 화려한 바닥으로 만든다." 척추가 휘었다. 목이 굳었다. 물감이 끊임없이 눈에 떨어져 시력이 심하게 나빠졌고, 완성 후 몇 달간 글을 머리 위로 들어야만 읽을 수 있었다. 거의 먹지 않았고, 비계 위에서 옷을 입은 채 잠들었으며, 씻지도 않았다. 나중에 장화를 벗기자 피부가 함께 벗겨졌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고생은 낙이 오기 전에 그를 거의 집어삼킬 뻔했다. 그 사이 몇 방 건너에서 젊은 라파엘로는 교황의 거실을 눈부신 우아함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브라만테의 열쇠로 몰래 시스티나에 들어가 천장을 본 라파엘로는 단 한 번의 목격으로 자신의 화풍을 완전히 바꿨다고 전해진다. 고독하고 괴로운 천재와 사교적이고 사랑받는 천재 — 둘의 경쟁은 르네상스 최대의 예술 대결이 되었다.

율리우스는 수시로 비계에 올라와 다그쳤다. "언제 끝나느냐?" 미켈란젤로의 대답은 역사에 남았다. "할 수 있을 때." 한번은 교황이 비계에서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를 떠나겠다고 맞받았다.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1512년 11월 1일, 천장화가 공개되었다. 로마는 숨을 죽였다. 500제곱미터가 넘는 면적에 300개 이상의 인물이 빛과 어둠의 분리부터 노아의 만취까지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중앙에서 신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한 틈을 건너 아담의 손가락을 향해 뻗어 있었다 — '아담의 창조'. 회화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영원히 재정의한 그림이었다. 라파엘로 자신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미켈란젤로의 시대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미켈란젤로는 성당을 나섰다. 몸은 부서졌지만 이름은 불멸이 되었다. 조각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그렇게 서양 문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야기의 교훈

가장 위대한 업적은 고통과 저항,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데서 태어난다

등장인물

M
Michelangelo Buonarroti
P
Pope Julius II
R
Raphael
D
Donato Bramante

출처

Vasari, Le Vite; Condivi, Vita di Michelangelo; Michelangelo's letters and poems; King, Ross. Michelangelo and the Pope's Ceiling, 2003